2020년07월08일 17:12
사진으로 보는 대학입시 42년
1977년-2019년
대학입시 42년
한 나라 운명의 전환점이자
천백만명 사람들의 인생 전환점!
1977년
1977년 12월 10일, 대학입시는 중국 력사상 유일하게 겨울철에 진행된 대학시험이다.
이날 농촌, 공장, 부대에서 온 570여만 명의 젊은이들이 어렵게 생긴 기회, 부푸는 가슴을 안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응시생이 너무 많고 국민경제도 금방 회복되기 시작할 때라 국가에서 시험지를 인쇄할 종이가 부족하게 되자 과감하게 "모택동 선집" 제5권을 인쇄할 종이를 시험지 인쇄종이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27만명의 젊은이들이 이듬해 봄에 꿈에도 그리던 대학교정으로 들어서게 되였다.
1978년
그해 대학입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통일로 출제하고 각 성(省)별로 합격시키는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 시험제도는 기본상 지금까지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는 진귀한 1978년, 대학성적 통지서이다. 408점의 성적의 주인공은 그 당시로 놓고 말하면 가히 "공부의 신"으로 불리울만 하다.
1979년
풍상고초를 겪은 중화인민공화국은 30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개혁개방의 봄바람속에서 대학입시를 7월 7~9일로 정했으며 1983년을 제외하고 줄곧 2002년까지 실시되였다.
1980년
이 옛날 사진은 그해 대학입시전 시험장에서 두 녀학생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다.
그녀들의 밝은 웃음은 분위기가 무겁기만 한 시험장에 홀가분한 기운을 더해주었다.
알 수 없는 시험과 미지의 운명 앞에서 과연 누가 진정으로 홀가분해질 수 있을가?
1981년
1981년 천안문광장, 밝은 등불아래 대학입시를 위해 공부하는 청년의 모습이다.
지식이 운명을 개변시킨다!
이 신념은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더욱 더 깊이 뿌리 내렸다.
1982년
그해, 마운(马云)이 처음으로 대학시험에 참가하였다.
각오가 남달랐던 그는 북경대학교를 지원했지만 아쉽게도 그해 수학 시험에서 1점 밖에 맞지 못했다.
이듬해 대학시험에서도 그의 수학성적은 19점 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마운은 "세번째" 도전에 나섰다.
세번째 대학시험에서 그의 수학성적은 마침내 79점에 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총점은 본과 점수선보다 5점 낮았다.
같은 학과의 모집 인원 미달로 마운은 결국 항주시사범학원 본과에 입학하여 외국어 학과에 조정 진입했다.
1983년
그해 대학시험 작문 제목에 처음으로 만화 한폭이 등장했다.
《여기 물이 없으니 다른 곳을 파 보자》라는 제목의 이 만화는 한 사람이 우물을 파고 여러번 팠지만 모두 수면에 다다르려고 할 때 포기하는 모습을 그렸다.
당시 한토막 재료나 하나의 제목으로 글을 쓰는데 익숙해진 수험생들은 이 문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학시험 답안지를 채점한 북경어문 특급 교원 설천동의 기억에 따르면 상당히 많은 수험생들이 이 만화를 제대로 리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 학생이 작문에서 "한 농촌 불량배가 공사의 댐을 파헤치려 했는데 파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는 이야기를 써서 답안지를 읽는 교원들을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1984년
10월 27일, 상해시 총공업회가 개최하는 대학시험 복습 강습반에 참가하려는 젊은이들이 등록 대청을 물샐틈 없이 둘러쌌다.
1985년
대학입시는 대학 시험 과목을 줄이는 개혁방향으로 나아갔다.
그해, 국가의 "총괄적인" 학생 모집 제도가 무료 국가 계획 학생모집과 유료화 국가 조정 학생모집을 함께 실행하는 "이중 제도"로 변했다.
1985년 대학입시 전야, 북경 171중학교 왕림은 한 남학생과 책상을 사이 두고 책을 보고 있다.
이들은 연애를 하고 있었고 후에 같은 대학교에 진학하여 결혼했다가 리혼했다.
사진에는 한쌍의 련인의 풋풋한 학생시절이 그대로 담겨있다.
1986년
"황강중학교"
"대입 입시"하면 빼놓을 수 없는 "신화"다.
이 "신화"는 1986년에 거의 절정에 달했다.
그해, 황강중학교는 309명의 학생들이 대학교에 진학하여 승학률이 91.4%에 달했고 600점 이상의 고득점자가 30명에 달해 전 성 1/9을 차지했다.
리과 1위, 2위, 문과 1위도 모두 황강중학교가 차지했다.
1987년
이 오래된 사진은 대학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이 신바람이 나서 시험장을 나서는 장면을 기록했다.
지금 수험생들의 표정과 거의 별다른 점이 없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1988년
그해, 강소성 대학입시에서 처음으로 작문을 "표절"한 것이 발견되였다. 대학시험 어문 과제 전문가인 고조준이 쓴 "대학시험 작문에 관한 이야기"(高考作文那些事)에 따르면 그해 대학시험 작문에서 "습관"이라는 제목으로 "견본권"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한 서술류의 문장이 너무 훌륭해 모두들 상등으로 판정하는 등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견본권"을 채점하는 선생님한테 보낸 후 이 교원은 이는 "표절"한 문장이라고 반영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표절로 의심되는"문장의 핵심 단어를 인터넷에 검색하고 곧바로 검색어가 나와 관련 문장을 대조하면 기본적으로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답안지 채점팀은 그 선생님에게 원문의 출처를 상기시켜 달라고 부탁한 후 교원 몇명을 파견해 근 5년간 "인민일보"와 "중국청년보"를 모두 꺼내 하나씩 찾았는데 마침내 1984년 5월 17일의 "중국청년보"에서 원문을 찾아냈다.
결국 그 글은 "표절"로 판정되였고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았다.
대학입시가 회복되여서 10년이 지난후, 전반 사회의 학습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정월 초하루날, 상해시의 도서관 자습실은 젊은이들로 꽉 차있었다.
1989년
국가교육위원회는 "보통 고등학교 학생모집 전국 통일시험 표준화 실시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표준화 시험이 본격적으로 실시 단계에 진입했음을 나타냈다. 이로써 대학입시라는 지휘봉이 전례없는 지휘효과를 보게 되였다.
표준화 시험은 전국의 기초 교육이 응시방향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표준화 시험은 표준화 답을 파생하고 나중에 답안지를 채점하는 기계가 사용되였다.
1990년
10월, 국가 교육위원회는 "3남개혁"을 시작했다.
호남, 해남, 운남 3개 성은 과거 대학시험의 문과, 리과로 나누던 것을 문사(文史), 리공(理工), 의농(医农)과 지광(地矿) 네가지 부류로 나누고 각 부류마다 4가지 과목만 시험을 치도록 했다.
이 중대한 정책의 선포시점은 이듬해 대학시험과 9개월도 채 안 남았던 시기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이 종이 서류로 인해 바뀌였다.
지금도 대학시험 내용과 형식은 계속 바뀌고 있다.
대학시험에서 매 수험생들마다 변수가 나타날 수 있다.
1991년
대학입시 석달 전, 국가교육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1991년부터 전국 보통고중 졸업시험제도(普通高中毕业会考制度)를 정식 선포했다.
시험은 원래 학업 수준 시험이였다. 하지만 나중에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일부 지방에서는 시험성적에 따라 일부 학생들을 미리 “아웃”시키고 다가오는 전국 통일 대학입시에 응시할 수 없게 했다.
1992년
류강동(刘强东)이 강소 숙천에서 대학시험 장원으로 되였다.
“年轻就是要:活出你自己”라는 책에 따르면 류강동의 어릴적 꿈은 정치에 종사하여 현장(县长)이 되여 행복한 고장을 건설하는 것이였다.
당시, 그의 성적으로 얼마든지 청화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원서를 작성할 때 청화대학교 물리학과를 포기하고 인민대학교 사회학과에 지원했다. 그때, 그는 인민대학교에 입학하면 벼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학은 모든 “소학과”를 통괄하는 “대학과”였다. 아쉽게도 입학 당일 밤, 류강동의 꿈은 산산쪼각이 나고 말았다. 같은 과의 선배는 사회학은 정치와 무관하다고 알려주었다. 게다가 취업률은 인민대학에서 꼴찌로부터 두번째라고 하였다.
오늘날에 와서 대학입시 전공과 취업이 맞물리지 않는 것은 더 이상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1993년
그해, 국가 교육위원회는 각 성시에 “3+2” 대학입시 과목을 개설했다. 문사류는 어문, 수학, 외국어 3개 과목에 정치, 력사 2개 과목을 시험치고 리과류는 어문, 수학, 외국어 3개 과목에 물리, 화학 2개 과목 시험을 치도록 했다. 이런 과목 설치는 2000년까지 계속 되였다.
이 사진은 1993년 대학입시 정치시험지이다. 이런 답안지 디자인은 유난히 친숙하고 눈에 띄인다.
1994년
전국 37개 중점 대학에서 일원화(并轨制)료금제도를 시범적으로 시행했다. 점차 “학생들이 입학할 때 스스로 양성비용의 일부를 내고 졸업생 대다수는 스스로 직업을 선택한다”는 기제를 세우기로 했다. 이전에 국가에서 생활비를 대주던 “국가 간부”대학생들도 스스로 돈을 내서 공부해야 했다.
호북 삼협패구 삼두평진 동악묘촌 려개영의 아들 망군이 1994년 전국 대학입시에서 651점의 우수한 성적으로
청화대학교 자동차공정학과에 입학하자 마을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아 축하해 주었다.
“입학시험 합격(金榜题名)”은 이 농촌 가정에 최고의 영광을 가져다 주었다.
1995년
시험장 진입을 앞둔 수험생들이 시험장 밖에서 마지막 복습을 하고 있다.
1996년
대학시험에서 또 한번 만화작문이 나타났다. 그해, 대학시험 작문 제목에 “육지 성형수술”과 “잘못 잘렸다”두 폭의 만화가 등장했다. 이는 당시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는 바 현실을 풍자하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로 인해 교육계와 의무계의 불쾌감을 유발하기도 했다.
1997년
7월 28일, 서안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자 수많은 응시생들이 대학시험에서 락방되였다. 국가에서 대학교를 운영하는 데 한계가 있으면서 이러한 시대 요구에 맞게 사회에서 대학교를 운영하는 현상이 나타났났다.
이 사진에는 학생모집 자문회에서 아들을 대신해 학교를 선택해주는 부모의 모습을 담겼다.
1998년
대학입시가 끝난 후 한 학생이 자신의 학습자료를 처리하고 있다.
두툼한 자료들을 쌓아올리니 학생의 키(170센치메터)를 넘어섰다.
1999년
세기가 교차하는 1999년, 우리나라에서는 대규모적인 대학생 확대 모집에 나섰다.
“엄마가 저를 1년 일찍 낳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대학입학 통지서를 받았을 때, 수많은 고중 졸업생들이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그해, 대학생 모집 비률은 47.4%로 껑충 뛰였다.
6월까지만 해도 많은 수험생들이 이같은 뜻밖의 행운을 상상치도 못했다.
확대 모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대학생 꿈을 이루게 되였다.
2000년
컴퓨터와 인터넷은 더이상 희귀한 물건이 아니였다.
북경 동대교에 위치한 백뇌회 컴퓨터성에는 이른 아침부터 많은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줄을 서서 무료 인터넷으로 점수를 조회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업일군에 따르면 오전에만 근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점수를 조회했는데 사람마다 표정이 달랐다고 한다.
2001년
대학시험에서 응시생이 “미혼, 년령 25세를 초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제를 취소했다.
수많은 고령 수험생들에게도 기회가 생겼다.
주식투자로 먹고 사는 황순봉은 이번 생에 대학시험을 볼 수 있을거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많은 고령 수험생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시험 새 정책의 첫번째 수혜자가 되였다.
2002년
7월 7일, 상해시 92800명 수험생들이 비를 맞으며 전시 3800여개 시험장으로 들어가 대학시험을 치렀다.
첫 어문시험의 작문 “바다를 향하여” 는 재료 범위가 너무 넓어서 일부 수험생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이 녀학생은 시험장을 나서자마자 어머니에게 하소연하였다.
2003년
그해, 교육부는 대학입시 기간을 한달 앞당겨 매년 6월 7일~8일에 고정적으로 배정하기로 했다. 대학입시는 드디여 무더위와 작별했다. 678의 해음(谐音)은 “합격하자”이다. 혹독하게 경쟁하는 시험에서 수험생들에게 필요한 일말의 심리적 위안이 아닐 수 없다.
그해, 전국적으로 대규모적인 사스 전염병이 발생하여 시험장에 들어가는 수험생들은 반드시 “체온 측정”을 해야 했다.
2004년
6월 7일, 63세 “할아버지 수험생” 취위민이 절강가흥 해녕1중 시험장에서 대학시험을 치렀다.
이런 “고령” 수험생은 오늘까지도 보기 드물다.
대학입학은 아름다운 하나의 꿈이다. 이 꿈은 젊은이들에게만 제한 된 것이 아니다.
2005년
해남 대학시험 장원 리양의 "청화대학 꿈이 사라지다"(梦断清华)가 전반 사회의 “대학입시 이민” 및 ”대학입시 공평함”에 대한 대토론을 유발하였다. 그해, 리양은 먼저 대학입시 점수가 해남 리과 1등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해천학교에서도 눈에 띄이는 현수막을 내걸고 리양을 축하했다.
이제 곧 청화대학교 꿈을 이루게 됐는데 누군가 리양이 해남에서 공부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는다고 신고하면서 해남성 본과 제1차 대학교 응시요구에 부합되지 않아 합격자격이 취소되였다.
리양은 후에 향향도시대학교에 입학했다.
2006년
6월 7일, 남경 금릉중학교 하서분교 선생님이 시험을 치르기 전, 수험생들에게 “마음은 사랑과 함께”라는 메시지를 붙인 사과를 나누어 주며 수험생들이 “안정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기”를 축원했다.
2007년
대학입시는 그 어느해든 긴장감을 조성한다.
2007년, 한 공공뻐스회사는 뻐스를 동원해 수험생들을 무료로 시험장에 데려다 주고 시험장 밖에 차간 안내소(车厢服务站)를 설치해 학부모들이 땡볕에서 기다리지 않고 뻐스에 올라 무료로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2008년
7월 3일, 사천 지진 재해구에서 대학입시를 연기하였다. 덕양 인민병원 “병동 시험장”에서 4명의 동기중학교 수험생들이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다.
2009년
대학입시가 끝난 후 광동성 네명의 “장원”이 말을 타고 자랑스럽게 거리를 거닐었다.
대학입시는 “장원경제”를 산생시켰다. 장원필기, 장원문제, 장원식단 등 “장원”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잘 팔렸다.
2010년
대학입시가 끝났다. 수년동안 볼 수 없었던 만개한 미소가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얼굴에 피여났다.
대학입시는 우리 모두에게 한차례 전쟁과도 같다.
대합입시를 마치고나면 큰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홀가분하다.
2011년
대학입시기간 공지에서 일을 중지하고 자동차는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아줌마들도 광장무를 추지 않았다. 전 사회가 각자의 방식으로 수험생들에게 선의를 베풀고 있었다.
한 수험생이 택시운전수, 교통경찰 등 애심인사들의 도움으로 시험장에 무사히 도착한 후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2년
6월 8일 오후 대학입시 영어 듣기 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남경시 9중 대학입시 시험장의 한 도로에서 학부모들이 일렬로 늘어서 길을 막고 이 곳을 지나다니는 자전거, 자동차더러 에돌아 갈 것을 건의한다. 자그마한 소음이라도 수험생들의 시험에 영향줄가 봐서이다.
대학입시는 종래로 수험생들만 치는 게 아니다.
2013년
해마다 대학입시가 가까워지면 학부모들은 수험생들을 위해 각종 기복행사를 하며 혹시라도 좋은 성적을 따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가 로심초사하고 있다.
2013년 5월 13일 강소성 남통시, 이 날은 민간에서 전해지는 문수보살의 생일이다.
수험생들의 학부모들이 당지 검산풍경구를 찾아 문수보살묘앞에서 향을 피우며 자녀들이 좋은 성적을 따내기를 기원했다.
2014년
대학입시를 며칠 앞두고 사천 파성 부분적 수헙생들은 책을 찢고 던지는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대학입시를 맞이했다.
2015년
2015년 6월 5일 아침 8시 8분, 륙안시 모탄장 중학교에서 수험생들을 바래다주고 있다.이런 행사는 일년에 한번씩 진행되는데 이날 42대 대형 뻐스가 수천명의 고3 수험생들을 싣고 “아세아주 최대 대학입시 공장”으로 불리우는 학교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수험생을 데려다주는 차량안에는 붉은 색 옷을 입은 학생들이 빼곡히 앉아있다. 일부 학생들은 창문을 열고 모탄공장중학교 필승이라고 웨친다. 모탄장 당지 만여명 군중과 학부모들이 차량 량측에서 수험생들을 바래다준다. 학부모들이 기발을 휘두르며 고3학생들을 응원하는 장면이 장관이다.
2016년
대학입시는 많은 중국인들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이다.
대학입시의 공평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정행위를 방지하는 수단도 사람에서 기계로 업그레이드 되였다.
2015년 <<중화인민공화국형법수정안(9)>>의 출범은
국가교육시험에서의 부정행위를 형법에 편입시켜
2016년 대학입시는 사회로부터 “사상 가장 엄격한 대학입시”로 되였다.
대학입시의 공평정의는 이 사회의 최저선이다.
2017년
2017년 6월 8일 오후 5시 10분, 마지막 시험인 영어시험이 끝났다. 수험생들은 환호하면서 즐겁게 교문을 나선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학부모들이 너도나도 핸드폰을 꺼내들고 이 장면을 찍었다. 일부 수험생은 교원과 친구들을 높이 공중에 들어올리며 V자 형을 그려 시험이 끝난 것을 축하했다.
시험을 잘 치든 못 치든 부모들은 자식들이 집에 돌아와 밥을 먹길 기다린다!
2018년
2018년 대학입시가 정식으로 막을 열었다.
첫 “00”후 수험생들이 집체로 시험장에 들어섰다.
막언은 <<딸을 배동하여 대합입시를 치던 하루>>(陪女儿高考的这一整天)라는 문장에서 대학입시날 딸의 심정을 적었다.
“7시부터 딸은 화장실을 자주 드나들었다. 대학입시에 대해 막언은 대학입시는 아주 나쁘다. 하지만 대학입시가 없으면 더 나쁘다”고 말했다.
2019년
6월 8일 대학입시가 끝날 무렵 안휘 10중 문앞에서 감동스러운 장면이 연출됐다.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남학생이 마지막 시험인 영어를 마치고 경쾌한 걸음으로 나왔다. 문밖에 있는 어머니의 앞에서 그는 어머니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무릎을 꿇는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와락 그러안았다. 현장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무릎을 꿇은 애는 왕항걸인데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대학입시를 마치고 꿇어앉은 것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라면서 대학입시를 잘치고 못치고를 떠나 이는 어머니한테 바치는 선물이라고 했다.
6월 23일 안휘 대학입시 성적이 공포되였고 그는 635점을 맞았는데 이는 안휘 리과 본과 점수선(一本线)보다 139점 높았다. 비록 장원은 아니지만 충분히 우수했다.
2020년
42년동안 기나긴 대학입시의 로정은
국가의 모습과 시대의 변화를 여실히 기록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 천군만마의 일원이다.
이 로정에는 몇세대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이 담겨있고
이들의 청춘과 운명을 기록했다.
시대의 수레바퀴는 계속하여 달리고 있다.
대학입시에 관한 이야기는
올해에도 다음해에도 계속될 것이다.
당신은 어느 해에 대학시험을 쳤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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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互联健谈